노상준의 저항적이며 치유적인 작은 문명
심상용(미술사학 박사, 미술비평)

현세계가 머물고 싶지 않은 곳이라는 자각이 머리를 들 때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이는 많은 화가와 시인들의 질문이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노상준
의 질문이기도 하다. 그에게 이 문명은 과잉이고 거품이다. 따라잡기 어려
울 만큼 급류고 과도하게 역동적이며 오르기를 포기할 만큼 높이를 지향한
다. 그가 살아왔던 도시들은 예외 없이 고도의 행동주의를 부추긴다. 경쟁
에서 뒤쳐지는 것이 용납되어서는 안 되고, 경력, 건강, 사람들을 포함하는
많은 것들을 자신의 관리목록 안에 잘 정착시켜야 하며, 언제나 성실해야
하고, 용기와 신념을 잃지 않아야 하며, 모든 성취는 가시적인 결과로 입증
되어야만 한다.

하지만 대체 무엇을 위해 그토록 치열해져야 하는 것인가. 동기는 열을 올
릴수록 더욱 불투명해지고, 물론 어떤 최소한의 결과도 담보되지 않는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마치 “어떤 힘에 이끌리기라도 하는 듯, 같은 행동들
을 반복하고 지속적으로 추구한다.” 동일한 트랙, 동일한 목표에 집착하
면서, 그리고 공허한 비교와 경쟁에 스스로를 함몰시키면서, 교육과 규범
과 제도를 동원해 그러한 사고와 행동을 서로에게, 부모가 아이들에게, 교
사가 학생들에게, 친구가 친구에게 설득하고 주입하고 강요하면서 그렇
게 한다.

이러한 과정을 겪어 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거의 넋이 나간 상태가 된다. 순
간순간 스스로를 사유로부터 소외시키고, 의식과 고립시키는데 중독된다.
‘기본적으로 빠르지 않은 리듬감을 가지고 사는’ 부류의 사람들-그들 중
한 사람이 노상준인-은 이 점점 더 강요되는 중독의 과정에서 직관적인 불
편함을 느끼고 일탈을 꿈꾼다. 나는 이 일탈의 꿈이 노상준이 새로이 재건
한 문명 안으로 들어가는 관문일 거라 생각한다.

노상준은 자신과 세상 사이에 존재하는 어떤 벽을 느낀다. 세상은 그로선
가담하고 싶지 않은 속도에 의해 유지된다. 그 속도는 그가 가진 것들, 해
낼 수 있는 것들, 일테면 시 쓰기, 상상하거나 꿈꾸기, 느린 산책, 새들의
지저귐에 귀 기울이기 같은 것으로는 감당할 수도, 도달할 수 없는 목표
다. 결국 노상준은 훨씬 덜 고립을 생산하고, 덜 소외를 심화시키는 덜 위
험한 세계를 만듦으로써, 자신이 속한 빠르고 폭력적인 세계에 저항하는
쪽을 선택했다.

노상준의 문명이 낳은 세계들은 작고 허름하며 값싸다. 우선 이 문명을 이
루는 질료는 고작 포장 박스로부터 추출된 폐골판지와 약간의 채색안료
일 뿐이다. 포장박스는 고향으로부터 고립된 이방인이었던 영국시절, 그
가 대면했던 차가운 세계에 대한 기억이요 그리웠던 고향의 살점 같은 것
이었다. 일테면 고향으로부터 온 것들을 감쌌던 피부 같은 것이랄까. 물론
그것이 통상적 의미의 예술을 위한 재료로서 적절한 선택일 리 없다. 그것
은 세련미는 고사하고 상당히 천민적이며 견고하지도 못하다. ‘인생보다
긴 예술’을 위해 특별히 할당되거나 생산된 고가高價의 전문재료들과는 거
리가 먼 것이다. 그리고도 이 가난한 재질로 된 세계를 격상시키기 위해 취
해진 조치라곤 약간의 안료로 그것들의 표면에 회화적 사실성을 부여하는
것이 다이다.

이것은 분명 하나의 태도라는 사실을 분명히 하자. 이젠 다이아몬드까지
그 재료로 삼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른 이 축이 뒤틀린 시대에 정면으로
엇나가려는 반동적 입장이 그것이다. 이 태도는 제국을 치유하기 위해 더
큰 제국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그리고 삶의 문제를 다루는데 조차 다이아
몬드로 치장한 것들이 필요하다고 믿는 이 시대의 착각과 궤변을 정확하게
간파는 것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예술조차 값비싼 것들이 삶에도 더 유효
하다는 감언이설의 소도구가 (거의)되어버린 시대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동반하는 태도인 것이다.

노상준의 태도는 그의 선언들이 아니라 작품 자체의 유전형질에 의해 분명
한 것이 된다. 그렇다면 아르테 포베라Arte Povera, 또는 가난한 미술Poor Art
의 이웃사촌쯤 되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아르테 포베라의 포베라가 예술
담론으로 재귀하는 반면, 여기서의 포베라는 대안적인 삶과 문명으로 튕
겨져 나가기 때문이다. 보라. 노상준의 예술은 질료로부터 온 것이 아니라,
삶의 기억과 경험으로부터 온 것들로 구성된다. 그 안에 아픈 경험을 끌어
안고 있는 이 세계는 가족의 손길이 배어있는 보잘것없지만 따듯한, 값나
가진 않지만 가치로운 것으로만 건설된다. 그의 세계에 예술담론의 울타
리를 넘어 치유적 차원이 가미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서울이나 런던 같
은 대도시는 결국 사람들을 자신들의 쪽방으로 몰아갈 뿐이다. 대기업과
그 산물들은 사람들을 왜소한 소비자로 만든다. 큰 것들, 기념비적인 가치
들, 부풀려진 욕망은 결국 주체를 소외와 고립무원으로 몰아가고 만다. 제
국, 세계적인 명성, 위대한 예술은 소유욕과 복수심을 부추길 뿐이다.
대안은 작은 것들에 있다. 큰 것들이 고립을 낳았던 만큼, 작은 것들은 대
화와 관계를 복원시킬 수 있다. 고독과 고통이 질주 속에서 양산됐다면, 행
복은 자전거를 타고 온다. 진정한 의미의 조각은 대리석이나 고풍스러운
브론즈로부터가 아니라 날짜분계선을 넘어온 포장박스로부터 가능하다
는 사실, 그것이 노상준이 새롭게 붙잡았던 예술론이자 미학이며, 새로운
문명으로 나아가는 관문이기도 한 것이다.

사람들은 이 작고 저렴하며 위협적이지 않은 세상을 내려다보면서 망각했
던 안도감을 회복할 것이다. 이를 단지 시점이나 시선의 문제로만 함축하
지는 말자. 이는 소통, 곧 경험의 공유인 동시에, 세계 자체에 대한 직관적
인식의 문제다. 이 세계가 언제나 낯익고 친숙한 것은 아니지만, 그 낯섬
조차 소외나 두려움이 아니라 안전한 호기심으로 다가온다. 노상준의 불
붙은 벌판에선 누구도 화상火傷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의 맹수들은 사나
운 척할수록 더 앙징맞다. 곧 발사될 듯 수직발사대에 장착된 로케트는 별
을 반사해내는 호수조차 교란시킬 수 없는 쓰잘 것이라곤 없는 물건에 불
과하다.

기념비성, 항구성, 명품은 이 세계와 가장 거리가 먼 가치들이다. 포장박
스, 감미로운 밤, 놀이동산, 플름라이드Flum Ride, 불꽃놀이, 발사되지 않는
로켓트로 구성된 이 세계는 하나의 문명, 곧 작기 때문에 위기들이 충분히
관리되고, 언제나 안전이 확보되며, 학습이나 강요 없이 세계를 조망하는
것을 겸허하게 허용하는 새로운 유형의 문명에 대한 제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