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유되어야 하는 불편한 진실

서준원 (NIMBUSCHAIR Integral Humanities)

부조리는 속임수 섞인 장난인가, 아니면 존재한 적이 없는 현실을 비춰주
는 방법론인가? 많은 사람들은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 Waiting
for Godo>나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 Offending the Audience and
Other SpokenPlays>과 같은 작품들이 주는 기이한 느낌에 당혹감을 느끼고
그런 느낌을 노골적으로 표현하지만, 서서히 “연극에서 일어나는 사건”과 “보편
적인 현실”사이의 괴리에 즐거움과 흥미를 느끼게 된다. 이후 극장 바깥의
평범한 현실로 돌아온 그들은 허구의 이야기에서 나온 부조리적인 구조들
이 평범한 일상 속에서 거부할 수 없는 현실로 존재하고 있음을 깨닫게 되
며 그 연극들이 단순히 코미디가 아니었다는 것을 깨닫게 된다.

사람들은 누구나 자신만의 환상 속에서 살도록 되어있다. 모든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는 소위 “보편적인 현실”이 현실적으로 완전히 배제될 수 없
는 이유는 환상을 인식하는 방법이나 근거 없는 믿음을 만들어내는 기전
을 대다수 사람들이 공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부조리’는 통상적으로 예
술 작품에 사용하는 용어는 아니지만 사람들은 르네 마그리트Rene Magritte
의 작품들이나, 혹은 살바도르 달리Salvador Dali의 작품들 같은 초현실주의
Surrealism 작품에서 유사한 당혹감을 경험한다. 사람들은 변화 없는 현실
에 지루함을 느끼게 된다. 이것은 매일 같은 옷을 입는 것에 지루함을 느
끼는 것과 다를 바 없으며 이 점에 있어서 예술가들도 마찬가지 이다. 하지
만 예술가들이 그러한 작품을 만들어내는 데에는 그냥 지루하다는 것 이상
의 좀 더 절박한 이유가 있다. 우리는 예술작품을 ‘사회를 반영하는 거울’
이라고 성격규정하기를 편리해 하지만, 예술작품이 갖는 좀 더 핵심적인
본질은 알려지지 않은 현실들에 대한 탐구이다. 어떠한 불일치나 왜곡일
지라도 이를 통해 현실에 대한 우리의 상상력을 확장시키고 또한 교정시
킬 수 있다면 허용될 수 있는 것이다. 사실 그래서 예술가란 이제까지 공
유되거나 채용되어 본 적이 없는 새로운 관점과 가려진 현실에 관심을 갖
는 사람들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노상준은 예술의 본질을 추구하고 있는 아티스트라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들의 근저에 놓여 있는 상상력은 우리들이 가진 관점에
서 기인한 현실세계를 정반대로 뒤집는다. 주목할만한 점은 그의 작품이
시각적으로 감정에 호소하기 보다는 보다 상징적이며 기술적이라는 점이
다. 노상준은 통상적으로 받아들여지는 존재물들의 정체성에 관하여 형
이상학적인 회의를 마음에 품은 듯하게 관습적으로 사물들 사이에 부여
된 경계가 가지는 절대성을 시험한다. 광장에 깔린 붉은 양탄자 Carpet/ The Art School>(2005)는 이러한 사례의 좋은 예이다. 종종 그
림 속에서 부수적인 오브제로 다루어져 관람객들의 시선을 끌지 못했던 양
탄자는 이 풍경에서 중요한 상징적 주체로 등장한다. 양탄자가 외부공간
으로 펼쳐짐으로써 자신이 깔려있었던 “실내”라는 본래의 공간이 가지는
정체성을 외부로 확장시킨다. 한편, (2005)에서 작가는 공원에
서 평화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는 사람이 화염에 둘러 싸여진 난감한 상황
을 즐기고 있는 것으로 이해한다. 노상준의 최근 작품에서 명확한 것은 그
가 채용하고 있는 대상들이 가지는 시각적 의미는 부차적이라는 점이다.
그는 다수에 의해 동의되고 지켜지는 관습의 견고함에 의해 제한 된 그 사
물들의 생존방식에 관심을 갖는다. 적어도 그가 제시하고 있는 현실세계 의
구조 속에서는 대상과 가치 사이의 모순되어 보이는 조합이 당혹스런
연결은 아니다. 그가 의미하는 바는 사물이 가지는 시각적 한계와 그 사물
에 연관된 관념의 견고함을 가볍게 뛰어 넘는 것이며, 작가 자신은 스스로
를 그러한 가치들의 차별성을 넘어선 어느 지점에 위치시키면서 행복과 같
은 어떤 긍정적인 것을 추구하는 인간의 열정이 부조리 극에 불과함을 깨
달아 가고 있는 듯하다.

대공원은 노상준이 작업에서 자주 주목하는 주제인데, 자신의 최근 전시
<이동유원지_Giant Funfair>(2010)에 이 제목을 붙였다. 그는 현실을 적
나라하게 드러내는 놀이공원의 세계로 관람객들을 초대한다. 20세기 철
학자들은 이상과 현실을 구분하지 못하는 인간의 의식을 탐구했는데 이것
이 바로 초현실hyper-reality이다. 이들은 디즈니랜드를 자신들의 이론에서
예증으로 사용하는데, 노상준의 초현실이 그들의 이론과 일치하는 것은
아니지만, 작가가 자신만의 어떤 현실을 보여주기 위해 사용하는 소재와
동일한 것이다. 놀이공원은 방문객들에게 즐겁고 환상적인 느낌을 불러일
으키는 여러 기구들로 가득 차 있다. 사람들은 이러한 기구들이 제공하는
환상을 현실처럼 받아들임으로써 스스로가 즐거움을 느끼거나 다른 사람
들의 즐거움을 자극하곤 한다. 그러나 노상준의 놀이공원에서는 방문객들
이 현실보다도 더욱 사실적인 현실에 노출되며 삶의 견고한 진실을 바라보
게 된다. 그의 놀이공원은 우리가 흔히 놀이공원에서 기대하는 것과는 정
반대로 슬픔이 깃든 축제이다. 이는 우리가 현실이라 믿는 놀이공원의 외
부에 존재하는, 실재하는 삶의 환상적인 신기루를 거꾸로 조명하는 은유
로서 작용한다.

노상준의 은유는 사람들이 경험하고 있는 불편한 현실과 애처로운 즐거움
에 집중한다. 사람들은 차를 운전해 멀리까지 여행할 수 있고 완벽한 해방
감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의 작품 (2010)에서 보이는
차들은 철재로 묶여져서 동일한 작은 원형의 노선을 반복해서 돈다.
(2009)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달리는 사람들도 마찬가지이다.
(2009)와 같은 작품에서 사람들은 도시의 번잡스러움을 떠나 안락
하고 차분한 장소를 어렵게 찾아 휴식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위에서 바라 본 이 광경은 혼잡하고 답답한 덩어리일 뿐이다. 그의 작품은
또한 폭포처럼 쏟아지는 물에 갈 곳을 잃은 해적선 (2009), 절벽
과 강으로 사이에 갇혀 한 발짝도 움직일 수 없는 사륜구동자동차
(2009), 환자들이 들어갈 수 없는, 옥상에 출입구가 없어서 헬기를
이용하더라도 환자들이 접근할 수 없는, 종합병원 (2009)등
을 보여준다. 노상준의 세계에서 자동차, 오토바이, 선박, 지프, 헬기 등 모
든 교통수단은 사람들의 이동을 위한 것이 아니라 이들을 옴짝달싹 못하게
하는 것이다. 노상준이 사용하는 이러한 부조리는 (2009)
에서 절정을 이룬다. 작품에서 배들은 자신들의 항해를 잊어버린 듯, 혹은
포기한 듯, 등대의 빛을 향해 돌진하는데, 실제로 등대는 육지에 세워져 있
어서 배로는 도착할 수가 없다. 등대는 목적지로 향하는 길을 비추는 것이
지 절대 목적지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사람들은 즐거움을 추구하지만 비
정상적인 현실에 갇혀있다. 교통수단을 소유함으로써 우리가 느끼게 되는
행복과 여행의 자유는 애석하게도 애처로운 환상에 불과하다.

사람들은 환상 속에 살고 있다. 노상준은 일반인들이 빠져 있는 환상에 함
께 빠져들지 않은 채 인간의 즐거움과 슬픔을 관조하는, 하지만 그 또한 자
신의 환상 속에서 이들을 관조하게 마련인, 예술가이자 인간이다. 환상과
현실을 구분하는 것은 아마도 우리가 결코 현실로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불편한 사실을 드러내는 일일지도 모른다. 이것이 바로 그의 작품들이 부
조리문학이나 초현실주의 미술이 그랬던 것처럼 진지한 관람객들을 지속
적으로 매료시킬 수 있는 이유이다.